타이베이의 밤을 완전히 다르게 즐기는 법 — 린선베이루 조도리
야시장도 클럽도 아닌, 타이베이에만 있는 독특한 밤 문화. 1980년대 일본 비즈니스맨이 만들어낸 골목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타이베이의 밤이라고 하면
스린 야시장, 라오허제 야시장, 아니면 시먼딩의 클럽 거리.
대부분의 여행자가 타이베이의 밤을 이렇게 채운다. 그런데 타이베이에는 이런 곳들과 완전히 결이 다른 밤 문화가 있다. 관광 책자에는 잘 나오지 않고, 현지인들도 "그냥 그런 곳"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면 얘기가 달라지는 동네다.
린선베이루(林森北路) 조도리(條通).
조도리가 뭔가요?
조도리는 일본어 '토리(通り, 골목)'에서 온 말이다. 타이베이 중산구(中山區)의 린선베이루 양쪽으로 뻗은 1조통부터 9조통까지의 골목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에 '다이쇼마치(大正町)'라는 이름으로 정비된 이 구역은, 교토의 격자형 도시계획을 본뜬 정갈한 골목 구조로 지금도 남아 있다. 전후에는 미군 기지 주변 술집 거리가 되었고, 1980년대에 일본 경제가 호황을 맞으며 일본 기업들이 대만에 대거 진출하자 이번에는 일본식 스낵(클럽)이 밀집한 유흥 거리로 바뀌었다.
최전성기에는 600여 곳이 넘는 일본식 술집이 들어서 있었다.
룸살롱이랑 다른 건 뭔가요?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조도리의 일본식 술집은 구조 자체가 다르다. 성적 서비스가 없다. 신체 접촉도 손을 잡는 정도가 한계이고, 키스도 금지다. 최전성기에 최고급 일본식 술집은 여성 직원들에게 업스타일 헤어, 차이나 드레스 착용, 꽃꽂이와 골프 수업, 비즈니스 수준의 일본어까지 요구했다.
이곳이 파는 건 '누군가와 함께 있는 느낌'이다.
출장으로 타이베이에 온 일본 비즈니스맨이 카운터에 앉으면, 상대방이 오늘 밤 무엇을 원하는지를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하고 그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간다.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지, 칭찬받고 싶은지, 그냥 혼자 있기 싫은 건지. 이걸 눈치채지 못하게 해내는 게 이곳의 일이다.
한국의 룸살롱 문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육체적 서비스가 완전히 배제된 형태라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일본 비즈니스맨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퍼졌고, 40년 넘게 살아남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빛 속으로》
이 동네가 배경인 넷플릭스 대만 드라마가 있다. 원제는 《화등초상(華燈初上)》, 한국에는 《빛 속으로》로 소개됐다.
1988년 조도리의 일본식 술집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드라마인데, 드라마 속에 나오는 치파오(旗袍), 어두운 카운터석, 마마상(업소 여주인)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실제 이 거리의 분위기를 제법 잘 담고 있다.
드라마를 봤다면 이미 조도리의 공기를 절반은 알고 있는 셈이다.
현지인이 알려준 장소들
명도(名度) — 7조통, 린선베이루 119번지 25호
일본인 오너가 운영하는 레트로 가라오케 바. 작은 무대, 따뜻한 조명, 머리 위의 초록 화분들. 1인당 NT$460 커버차지에 음료 2잔 포함. 부담 없이 조도리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입구다.
지신랴오 사케 바(知心寮) — 9조통
사케 소믈리에(唎酒師) 자격증을 가진 오너가 운영하는 일본주 전문 바. 100종 이상의 사케를 갖추고 있고, 삼군궈(三軍鍋)라는 시그니처 전골이 있다. 영어 메뉴 있음. 조도리에서 가장 진입 장벽이 낮은 곳 중 하나.
툰베이 이자카야(吞兵衛) — 린선베이루 119번지 28호
20년 이상 된 터줏대감 이자카야. 식재료 일부를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온다. 죽통 사케(竹筒淸酒)가 시그니처.
BAR NINE — 6조통
10년 넘게 조도리에서 일하다 직접 바를 차린 마마상 시에나의 가게. 일반 바 형식이라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지만, 대화를 잘 이끌어준다는 느낌은 그대로다.
새벽에 먹는 국수 한 그릇
조도리 가게들은 새벽 3~4시까지 영업한다.
자리를 마무리하고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국수를 먹으러 간다. 린선베이루 67번지 골목 입구에 간판 없는 포장마차가 있다. 현지에서는 '리잉 면포(麗英麵攤)'라고 부르는데, 참깨 소스 국수가 메인이다.
조금 더 걸으면 279번지에 '가오자좡 미타이무(高家莊米苔目)'가 있다. 50년 가까이 됐고 새벽에도 문이 열려 있다. 미타이무 탕(쌀국수 일종)과 루러우판(돼지고기 덮밥)으로 마무리하는 게 조도리 사람들의 방식이다.
가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들
- 시간: 밤 9시 이후부터 분위기가 살기 시작한다. 자정 전후가 피크.
- 위치: MRT 중산역(中山站)에서 도보 10분 내외. 6조통~9조통이 메인 구역.
- 전통 일본식 술집: 들어갈 수 있지만 비용이 높고, 일본어가 통하면 훨씬 대접을 잘 받는다.
- 언어: 명도, 지신랴오는 영어 가능. 조도리 전반적으로 일본어가 제일 잘 통한다.
야시장과 클럽이 지겨워졌다면, 타이베이가 40년 동안 숨겨온 다른 밤을 구경해 볼 만하다.
